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가 2년 넘게 백담사에서 살았던 이유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가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2년 1개월, 정확히 769일 동안 살았던 이유는 단순히 불교에 귀의하거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던 ‘5공화국 청산’과 5·18 민주화운동 및 권력형 비리에 대한 책임 추궁을 피하거나 감당하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은둔이라는 성격이 훨씬 강했습니다.

다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면 왜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났는지 → 왜 퇴임 후에도 책임론이 커졌는지 → 왜 하필 백담사였는지 → 왜 2년이나 길어졌는지 → 그곳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 → 왜 다시 서울로 돌아왔는지를 순서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전두환 부부가 백담사에 들어간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5공화국 통치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정치적 책임 추궁이 거세졌기 때문입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임 기간에 발생한 과오와 비리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힌 뒤,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서울을 떠나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로 들어갔습니다. 대한민국사 연표에도 이날을 ‘전두환·이순자 부부, 사과문 발표하고 설악산 백담사 은둔’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당시 백담사행을 ‘반성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정치적 맥락에서는 이것을 흔히 ‘백담사 유배’라고 불렀습니다. 법원이 내린 형벌이나 공식적인 유배형은 아니었지만, 전직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 깊은 산속 사찰에 장기간 머물렀다는 점에서 사실상 정치적 귀양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2년 동안 살 계획이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일종의 임시 은거로 생각했지만 정치적 상황과 여론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1988년 11월 23일부터 1990년 12월 30일까지 769일을 백담사에서 보내게 됩니다.


2. 왜 전두환이 퇴임한 뒤에도 문제가 계속됐을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전두환은 1988년 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987년 민주화 이후 전두환 정권의 과거를 조사하고 책임을 묻자는 요구가 폭발적으로 커졌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12·12 군사반란과 정권 장악 과정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통해 군부 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권력을 확대하면서 대통령이 됐습니다.

둘째는 1980년 5월 광주 문제

특히 훨씬 더 큰 문제는 5·18 민주화운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에 대한 책임 문제였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과거 군사정권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여기에 전두환 정권의 권력형 비리와 부정축재 문제까지 더해졌습니다.

즉 전두환 입장에서는 대통령에서 퇴임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임 후에 과거 정권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적 청산이 시작된 셈입니다.

연합뉴스도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전두환이 퇴임한 뒤 5·18과 5공 비리에 대한 책임자 처벌 요구가 거세졌고, 결국 1988년 11월 대국민 사과 후 백담사로 향했다고 정리합니다.


3. 특히 1988년은 ‘5공 청산’이 본격화된 시기였습니다

1988년에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노태우 역시 전두환과 가까운 군부 출신이었고 전두환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상황은 과거와 달랐습니다.

국민들은 단순히 정권이 바뀌는 것만 원한 것이 아니라,

  • 과거 군사정권의 진상 규명
  • 5·18의 진상 규명
  • 책임자 처벌
  • 권력형 비리 조사
  • 부정축재 문제 조사

등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국회에서는 5공화국 비리와 광주 문제를 다루는 청문회가 진행됐습니다.

이른바 ‘5공 청문회’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전두환을 비롯해 과거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국민 앞에서 과거 행적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두환에게 상당한 정치적 압박이었습니다.


4. 그래서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대국민 사과를 합니다

결국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연희동 자택에서 국민을 상대로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날 전두환은 자신의 재임 기간에 있었던 과오와 비리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자금과 개인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전두환이 헌납하겠다고 밝힌 재산은 정치자금 139억 원과 개인재산 23억 원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 전두환과 이순자 여사는 연희동 자택을 떠났습니다.

목적지가 바로 백담사였습니다.


5. 그런데 왜 하필 ‘백담사’였을까요?

백담사는 강원도 인제군의 설악산 깊은 곳에 있는 사찰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서울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편리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전직 대통령이 외부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내기에는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서울의 연희동 자택에 그대로 있으면 계속 언론과 시위대,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지만, 깊은 산속 사찰로 들어가면 외부와의 접촉을 상당 부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담사는 일종의 ‘정치적 격리 공간’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시 언론 역시 이를 ‘은둔’, ‘유배’ 등의 표현으로 보도했습니다. 서울신문은 훗날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전두환 부부가 백담사에서 ‘반승반속의 생활’을 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법적으로 전두환에게 백담사에서 살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은 아닙니다.

즉 법원의 판결에 따른 형벌로 절에 간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사회적 상황 속에서 전두환 본인이 서울을 떠나 백담사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는 ‘백담사 유배’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지만, 법률적인 의미의 유배는 아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6. 처음부터 ‘2년 동안’ 살기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이 처음부터 2년 동안 백담사에서 살기로 하고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 전두환이 발표한 취지는 서울을 떠나 조용히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처음부터

“나는 백담사에서 769일 동안 살겠다.”

라고 기간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정치적 상황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5공 비리와 광주 문제에 대한 논란도 계속됐고, 전두환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여전했습니다.

결국 당초의 짧은 은거가 장기간의 생활로 바뀌었습니다.

MBC의 당시 회고 보도 역시 당초 잠시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여론이 가라앉지 않아 은거 기간이 길어졌다고 설명합니다.


7. 그러면 백담사에서 2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여기에서 또 하나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전두환 부부가 백담사에 있었다고 해서 매일 불교 수행만 하면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사찰 생활과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생활이 섞여 있었습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생활하면서 설법을 듣거나 불교 행사에 참석하는 한편, 자신의 과거 정치생활을 돌아보는 생활을 했습니다.

1990년 11월 서울신문 보도를 보면 전두환은 당시 하루에 여러 차례 설법을 들었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보다는 탈정치적인 내용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청와대 시절을 회고하는 글을 쓰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보도됐습니다.

즉 백담사에서의 생활은

사찰 생활 + 은둔생활 + 전직 대통령의 개인생활

이 결합된 형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8. 이순자 여사도 함께 들어간 이유

전두환 혼자 백담사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부인 이순자 여사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1988년 11월 23일 두 사람이 함께 연희동을 떠났고, 이후 769일 동안 백담사 생활을 함께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이순자 여사는 전두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생활 동반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함께 은둔생활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배됐다’는 표현을 쓰더라도 실제로는 전두환 부부가 함께 백담사에서 생활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9. 정말 2년 내내 백담사 밖으로 나오지 않았나?

그것도 아닙니다.

769일이라는 기간 동안 백담사에 생활 기반을 두었지만 완전히 외부와 단절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국회 청문회 출석입니다.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은 국회의 5공화국 및 광주 관련 특위 합동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했습니다. 이후 다시 백담사로 돌아갔습니다.

즉 백담사에서 2년을 살았다는 것은

769일 동안 단 한 번도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백담사를 주된 생활공간으로 삼아 은둔생활을 했다는 뜻

입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국회 증언을 위해 서울에 내려온 것과 여름에 속초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거의 2년을 산사에서 지냈다고 전해졌습니다.


10. 그런데 청문회에 나와서 오히려 논란이 더 커졌습니다

전두환이 백담사에서 생활한다고 해서 5공 청산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은 전두환에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권력 장악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5공 비리와 관련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등을 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회에 출석한 전두환에게 상당한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의 청문회 증언은 국민들의 기대와 야당의 요구를 충분히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청문회 출석 후에도 논란은 계속됐습니다.

그래서 백담사 은둔생활 역시 끝나지 않았습니다.


11. 왜 그렇게 오래 있었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치적 상황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두환이 서울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정치적 논란이 커질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특히 연희동 자택은 전두환의 정치적 상징성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오면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되고 시위와 반대 여론이 다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담사에 머무는 것이 당시에는 여러 측면에서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잠시 반성하겠다 → 여론이 가라앉지 않음 → 계속 머무름 → 청문회 출석 → 다시 백담사 → 2년 이상 경과

라는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12. 백담사 생활이 ‘벌’이었느냐는 문제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미묘합니다.

법적으로는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전두환이 당시 형사재판을 받아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백담사에 보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보면 상당히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언론에서는 백담사 생활을 ‘유배’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법률적 의미

  • 유배형 아님
  • 법원의 형벌 아님
  • 강제수용소 아님

정치·사회적 의미

  •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압박
  • 국민적 비판 속에서 서울을 떠남
  • 외부와 거리를 둔 은둔
  • 사실상 ‘정치적 귀양’과 같은 상징성

이라고 구분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13. 재미있는 것은 백담사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지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의 정치적 지지자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백담사에는 측근과 친인척, 신도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두환 부부가 백담사에 머무는 동안 법당에서 측근과 친인척, 신도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은거 2년을 기념하는 법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백담사는 단순히 완전히 고립된 ‘감옥’ 같은 곳은 아니었습니다.

전두환 부부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불교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있었습니다.

다만 대통령 시절처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14. 그렇다면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정말 반성했을까?

이 부분은 역사적 평가와 개인의 내면을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전두환은 백담사에 들어갈 때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전두환이 자신의 책임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인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큰 논란이 있습니다.

특히 5·18과 관련해서는 이후에도 전두환의 태도와 발언이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백담사에 들어갔으니 전두환이 2년 동안 5·18에 대해 진정으로 반성했다.”

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백담사 생활 자체와 전두환의 역사적 책임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15. 그럼 언제 서울로 돌아왔나?

결국 1990년 12월 30일입니다.

전두환과 이순자 여사는 이날 오전 9시쯤 백담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후 1시 50분쯤 서울 연희동 자택에 도착했습니다.

KBS 당시 보도는 이를 ‘2년 1개월 동안의 은둔 생활을 마치고 서울 자택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서울신문은 이 기간을 정확히 769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즉,

1988년 11월 23일 → 1990년 12월 30일

입니다.

그래서 흔히

‘전두환의 백담사 2년 1개월’

이라고 말합니다.


16. 그런데 왜 1990년 말에야 돌아왔을까?

전두환은 서울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귀가가 노태우 대통령의 뜻과 여야 지도자 및 사회 각계의 의견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밝혔습니다.

KBS 당시 보도에도 전두환이 귀가하면서 이 같은 취지로 설명했다고 나옵니다.

즉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2년 이상 산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이제 다시 서울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단계라고 본 것입니다.


17. 그런데 백담사에서 나온다고 해서 전두환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1990년 12월 전두환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두환에 대한 역사적·법적 책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몇 년 뒤 정치적 상황이 완전히 바뀝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추진됐고, 과거 군사정권의 문제를 다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결국 전두환은 1995년 다시 수사를 받고 구속됩니다.

따라서 시간순으로 보면 상당히 극적인 흐름입니다.

1988년

전두환 퇴임

5공 청산 및 5·18 책임론 확대

대국민 사과

재산 헌납 발표

백담사행

1988~1990년

백담사 은둔

국회 청문회 출석

다시 백담사 생활

1990년 12월

서울 연희동 귀환

1993년 이후

문민정부 출범

과거사 청산 강화

1995년

12·12와 5·18 관련 수사

전두환 구속

백담사 생활은 전두환의 역사적 책임 문제가 끝난 사건이 아니라, 그 책임 문제가 본격적인 법적 처벌 단계로 넘어가기 전의 한 장면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18. 그래서 ‘백담사 2년’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백담사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상당히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두환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서 물러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의 대통령 관저가 아니라 설악산 깊은 곳의 작은 사찰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이 변화 자체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변화를 상징합니다.

한마디로,

‘권력을 가진 군사정권의 최고 권력자’에서 ‘국민의 책임 추궁을 받는 전직 대통령’으로 신분과 정치적 위치가 급격히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언론이 백담사 생활을 ‘유배’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19. 다만 ‘전두환이 절에서 2년간 벌을 받았다’고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동시에 봐야 합니다.

① 전두환 자신의 선택

전두환은 대국민 사과를 한 뒤 스스로 서울을 떠나 백담사로 갔습니다.

② 당시의 정치적 압박

그러나 그 선택의 배경에는 5공 청산과 5·18 및 비리 문제에 대한 엄청난 국민적·정치적 압박이 있었습니다.

③ 법적 처벌은 나중이었다

백담사 생활 당시에는 아직 전두환이 12·12와 5·18 문제로 형사처벌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백담사는 ‘감옥’도 아니고 ‘법적인 유배지’도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사실상 귀양에 가까운 은둔 장소였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20. 한눈에 정리하면

시기사건의미
1987년6월 민주항쟁과 민주화군사정권의 권력 기반 약화
1988년 2월전두환 대통령 퇴임노태우 정부 출범
1988년5공 청산·5·18 진상규명 요구 확대전두환에 대한 책임론 본격화
1988년 11월 23일대국민 사과전두환이 과거 통치의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입장 표명
같은 날백담사행서울을 떠나 은둔생활 시작
1989년 12월 31일국회 청문회 출석5공 비리·광주 문제에 대해 증언
1990년백담사 생활 지속정치적 은둔 계속
1990년 12월 30일서울 귀환769일간의 백담사 생활 종료
1995년12·12·5·18 관련 수사 및 구속백담사 이후 결국 형사책임 문제로 이어짐


핵심만 아주 쉽게 말하면

전두환 부부가 백담사에서 2년 넘게 산 이유는 “절에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자신이 집권했던 5공화국의 문제에 대한 책임 추궁이 계속됐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대국민 사과를 하고 서울을 떠나 조용히 반성하겠다며 이순자 여사와 함께 백담사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민들의 5공 청산과 5·18 진상규명 요구가 워낙 거셌기 때문에 당초의 짧은 은거가 장기화됐습니다.

그래서 769일 동안 백담사에서 생활했고, 1989년에는 청문회 출석을 위해 잠시 서울에 내려오기도 했으며, 1990년 12월 30일에야 연희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백담사 생활은 전두환에 대한 법적 형벌이 아니라, 5공화국에 대한 국민적 청산 요구 속에서 이루어진 정치적·사회적 은둔이었으며,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유배’에 비유했다.

그리고 이 백담사 생활이 끝났다고 해서 전두환의 역사적 책임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몇 년 뒤 12·12와 5·18에 대한 형사책임을 묻는 과정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백담사 769일은 전두환의 정치적 몰락 과정에서 하나의 중간 단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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